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3세 (문단 편집) === 유골 발굴 === 결국 [[2012년]] 필리파는 민영 방송사인 [[Channel 4]]로부터 리처드 3세 유골 발굴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케이블 채널 교양국의 단발성 역사 발굴 프로그램으로 편성하려고 했던 듯하다.] 물론 리처드 3세 협회도 열심히 모금해주었고 발굴 현장에서 먼저 Channel 4가 전과정을 독점 촬영하는 것을 조건으로 약 4만 파운드를 기본 자금으로 필리파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에 지원했다. 다만 4만 파운드로 리처드 3세가 매장되었다고 추정하는 옛 수도원 터 전체를 발굴할 수는 없으므로,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매장되었을 법한 유력한 후보지 두 곳에 구덩이를 파서 발굴하고, 결과물이 시원치 않으면 3번째 구덩이를 고르기로 했다. 현재의 지도와 [[중세시대]] 수도원을 포함한 지역 측량지도를 근거로 후보지를 골랐다. 첫 번째 구덩이는 리처드 3세가 왕족이나 귀족들이 종교시설 부지에 묻힐 때 누리는 [[특권]]을 바탕으로, 특히 리처드 3세의 유해는 합창대 근처에 안장되었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경당 내 합창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곳에 팠다. 두 번째 구덩이는 역시 유력한 매장 후보지인 경당 더 안쪽 제대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 세 번째 백업 구덩이는 수도원의 건물 안쪽으로 파기로 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수도원 터가 있는 레스터시 소유 건물이[* 우습게도 레스터시에는 이 건물을 아동복지국 건물로 사용하였다. --조카들을 죽였다고 알려진 삼촌 장지 위에 아동복지국이라니--] [[재건축]] 대상이 되어 내부를 모두 비웠다. 게다가 구덩이를 파기로 결정한 세 군데 모두 큰 건물이 없는 [[주차장]]이라 발굴팀은 거리낌없이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시청 부속 건물들을 모두 비우긴 했지만, 옛 수도원 경내의 약 83%를 차지하여 실질적으로 발굴할 수 있는 곳은 약 17%에 불과했다. 게다가 발굴팀은 그중 약 1% 정도만 발굴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에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해를 찾음은 로또 1등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2012년 [[9월]] 레스터 대학의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Richard Buckley)를 수장으로 레스터시 주차장에 첫 삽을 떴다. 리카디언들은 600년 묵은 숙원을 풀 기회라며 흥분했지만, 레스터 [[대학교]]를 대표로 한 고고학팀은 처음부터 이 발굴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장미 전쟁]] 당시의 수도원을 발굴하는 데 의의를 두었을 따름이다. 유적을 발굴할 때 역사의 한 인물을 특정해 목표로 발굴하지 않음은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처음부터 특정인물이나 물품을 목표로 발굴이나 연구를 진행하면 [[후지무라 신이치]]처럼 주작에 능한 학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학자 개인의 엄청난 명예도 명예지만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적 중요인물의 유골만 찾을 수만 있다면 (설령 다른 부장품이 없더라도) 연구자료를 쏟아낼 수 있고, 기존의 학설들도 순식간에 뒤집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눈이 돌아갈 일이다.] 그러다 보니 고고학장이던 리처드 버클리는 이 발굴이 성공하면 내 모자를 먹겠다며 이 발굴이 너무 허황된 꿈을 품고 진행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자를 진짜 먹었다.--[* 농담을 기억했던 학생들이 모자 모양 케이크를 만들어 왔다.] 첫 번째 구덩이를 파기로 한 주차장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조심스레 [[흙]]을 파 내려가하자 가장 먼저 [[빅토리아 여왕]] 시대 즈음에 재개발된 흔적으로 보이는 지반이 나타났고, 그 밑을 더 파내려 가자 이곳이 옛 수도원 터였음이 금방 드러났다. 중세시대의 벽돌부터 바닥에 깔린 타일과 유리 파편 등등 첫 번째 구덩이가 정확히 수도원 부지를 파고들었음을 레스터 대학 연구진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수도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구덩이를 더 팠는데, 예상치 못한 유골이 나타나는 바람에 유골의 양 정강이 뼈가 파손되었다.[* 당시 촬영을 하고 있어서 파손을 지적하자 발굴팀원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게다가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소낙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을 찾을 확률은 너무 낮았다. 이 탓에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에서 정부에 발굴 허가증을 받을 때 유골 수습 허가는 따로 받지 않았으므로 1번 구덩이의 발굴을 멈추고 다시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날씨]]와 허가증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혹시 있을지 모를 유전자 오염[* 동식물, 사람이 사망하면 그 순간부터 유전자는 파손된다. 발굴된 유골 역시 발굴 당시의 상태와 수습과정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유전자의 정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유골의 여러 부위에서 샘플을 수집해 유전자 조각을 증폭하고 비교하여 퍼즐 맞추듯 파손된 유전자를 복원하는데, 이때 유골을 수습한 현대인의 입김이 뼈에 닿으면 현대인의 온전한 유전자가 고대 유전자를 증폭하는 과정에서 결과를 망쳐버릴 수 있다.]을 막기 위해서 유골을 다시 흙으로 덮고 그 위로 비닐을 감싸는 등 응급보존처리를 한 뒤 유골 발굴 허가증을 급하게 신청했다. 유골 발굴 허가를 받기까지 약 열흘 남짓 걸리는 관계로 발굴팀은 그동안 2번 구덩이를 파서 수도원의 정확한 모형을 파악하기로 결정했다. 2번 구덩이를 파보자 해당 위치는 수도원의 부속시설 자리였다. 중세 시절의 지도와 비교해 수도원 부지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었다. 1번 구덩이의 위쪽, 예비 후보였던 3번 구덩이 구역을 발굴해 수도원 내 경당의 위치를 더 명확하게 잡기로 하였다. 3번 구덩이가 경당 내 제대 한가운데를 가로질렀으므로 예상했던 대로 1번 구덩이, 특히 정강이뼈가 발견된 부분이 수도원 경당 내 [[성가대]] 단상 근처임이 확실해졌다. 정강이 뼈 주변을 더 파서 정리를 하자 주변의 성가대 단상 위치가 드러났다. 이 [[뼈]]가 리처드 3세의 시신이라면 성가대 단상 근처에 묻혔다는 기록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부로부터 유골 발굴 허가를 받자 전문가를 초빙해 정강이뼈 근처를 더 파서 나머지 유골을 발굴했다. 골반뼈를 발굴하자 양쪽 손팔뼈가 X로 겹쳐서 골반뼈 왼쪽에 뉘여 있었다. [[레스터]] 지방과 영국 중세 시대 유골을 발굴했던 발굴팀은 이런 방식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당시의 일반적인 장례법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골반뼈에서 꼬리뼈를 발굴해내고 [[척추]] 뼈를 발굴하자 점차 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었음이 드러났다. 매장지 흙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망자가 생전에 앓던 질병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다. 레스터 대학 고고학팀은 조심히 나머지 부위도 수습했지만 양쪽 발 유골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발굴팀은 매장층 윗쪽에 보이는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의 지반 공사 흔적을 근거로 해당 부위의 뼈가 소실되었고, 당대에 조금만 더 기초공사를 했다면 유골이 모두 소실되었을 확률이 높았다고 추정했다. 발견된 유골의 전체 모습은 생각보다 처참하였다. 처음에 발견된 해골은 몸의 유골에 비해 위쪽에 위치했는데, 정식으로 준비한 장지가 아니라 급하게 마련한 곳이라서 시신을 구겨넣은 탓이라고 추측했다. 이외에도 유골 외에 다른 매장품이 발견되지 않았고, 수의를 착용했다면 발견되었을 섬유 조직도 나오지 않았음을 근거로, 시신의 옷을 모두 벗겨 나체로 수도원 경당 한가운데에 안장했다고 추측했다.[* 사실 이는 중세 유럽의 전장에서 흔한 일인데 당시 국왕이나 귀족의 갑주, 옷, 장비는 당시에는 고가였기에 그들이 전사할경우 적군이 그들의 장비를 탐내서 모두 벗겨갔다. [[체사레 보르자]]와 [[부르고뉴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도 전사했을때 적군이 그의 장비와 갑주, 옷을 모두 벗겨나서 발견했을때의 시신이 나체상태였다.] 유골을 조심스럽게 수습하자 유골 전체에서 무기로 공격받은 자상이 있었고, 등에는 화살촉으로 보이는 쇳조각도 발견됐다. 이 쇳조각은 X선 검사해보니 로마시대의 못이라 리처드 3세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못이 우연히 흙 속에 섞여 들어간 듯하다. 이 전과정을 지켜보던 필리파는 발굴내내 감정의 기복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유골이 박스에 담겨 구덩이를 나오자 필리파와 같이 발굴에 참가했던 향토사학자는 리처드 버클리 학장에게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면서 리처드 3세의 국왕기를 둘러 [[레스터 대학교]]로 보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reyfriars2.jpg|width=100%]]}}} || || 레스터 대학에서 화가에게 의뢰한, 수도원 성가대 구역에 매장되는 리처드 3세 상상도 || 수도원 경당 내 제대 자리였던 3번 구덩이에서도 관과 함께 얇은 납으로 감싸 매장한 지체 높은 [[사람]]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이후 검사에서 [[40대]] 후반 [[여자]]라고 확인하였고 레스터시에 남은 장례기록을 근거로 귀족 부인이었을 매장자의 신분도 추측했지만 [[유전자 검사]]로 비교해볼 후손이 없어 추측으로 남았다.[* 묘비나 명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3번 구덩이의 유골이 먼저 수습되었다면, 높은 신분을 암시하는 매장법 때문에 리처드 3세의 유골로 착각하고 나머지 구덩이는 그냥 내버려뒀을 가능성이 높다고 리처드 버클리 고고학장이 덧붙이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eadcoffin.jpg|width=100%]]}}} || || 같이 발견된 납관에 있던 유골 || 수습된 유해가 리처드 3세일 가능성이 높다는 [[뉴스]]가 전세계로 대서특필되었지만 레스터 고고학부는 검증에 들어갔다. 먼저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 덕에 한꺼번에 여러 가지 [[정보]]가 드러났다. 탄소연대측정으로는 리처드 3세의 시대보다 약 100년 정도 더 빠른 [[14세기]] 유골이란 결과가 나왔지만, 육식과 특히 해산물을 많이 섭취하는 귀족이나 왕족 등 고위층의 유골은 평민들이 주식으로 먹었던 곡물과는 다른 탄소가 뼈에 축적되므로 오류치를 감안하면 해당 유골은 리처드 3세가 활동한 [[15세기]] 무렵 유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안정 동위원소 분별법으로 망자가 거주한 지역과 식생활도 추측할 수 있었는데, 문헌에 남은 리처드 3세가 살았던 지역과 거의 일치했기에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라는 한 가지 증거가 되었다. 유골의 상태는 리처드 3세가 맞은 참혹한 죽음을 잘 보여주었다. 런던의 저명한 법의학자들을 초빙하여 조사해보니 리처드 3세가 머리 쪽을 [[송곳 단검]][* 여러 용도로도 쓰이지만 리처드 3세의 경우엔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 위에서 눌러 넣는 확인사살 용도라고 봤다.]으로 강하게 찔리고 핼버드(미늘창)에 머리 뒷부분이 잘려나가 죽었다고 설명하는 사료와 거의 일치하였다. >(전략) 그의 뼈에서는 많은 상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상처는 후두부에 있는데, 도끼(할버드, 빌, 폴암 등. 전승에 의하면 왕을 처치한 것은 웨일스인이라고 하므로 웰시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로 보이는 흉기가 후두골을 강타하여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후두부에는 상처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검이나 창 같은 흉기에 찔린 것으로, 뇌를 관통하여 반대편 뼈까지 도달한 깊은 상처(깊이 10.5 cm)입니다. 당연하지만 이것도 즉사할 정도의 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32&aid=0002301930&date=20130204&type=1&rankingSeq=6&rankingSectionId=104|#]] 그밖에 몸 전체에 보이는 여러 무기에 찔린 듯한 흔적들은 전투 당시 입은 상처가 아니라 사망 후에 반군이 망자를 모욕하고자 고의로 시신을 훼손한 흔적인 듯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